분노 조절 장애에 관하여... - 분노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

분노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내재한다. 다만 전두엽이 그것의 발현을 제어하고 있을 뿐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등장하는 ‘하이드’라는 인격적 존재는 이러한 분노의 보편성에 대한 표상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서사는 과거에 한정되거나 가상에 불과한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현존하는 만인에 대한 초상이다.

 

분노조절장애는 그런 분노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이유에서 비롯되거나, 일정 수준을 능가해 빈번히 표출되는 경우를 통칭한다. 분노조절장애의 주된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은 스트레스다. 그러나 스트레스의 원인은 특정할 수 없다. 즉, 각 개인에 따라 스트레스의 진원은 달라지며, 그것이 가리키는 범주의 외각선 또한 모호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모호한 말을 빌려 그 발원지를 추정해보자면, 궁극적으로 당도하게 될 지점은 ‘불합리함’일 것이다. N포세대로 상징되는 청년세대를 비롯해, 사회에 이미 몸담고 있는 중․장년층, 그리고 사회의 뒷전으로 밀려난 노년층에, 걸친 현대의 전 세대 누구나 모종의 불합리함을 몸소 겪고 있다.

 

그런 불합리함이 극명히 대두되는 지점은 바로 사회, 경제적 측면이다. 파레토 법칙이 시사하고 있듯이 권력은 소수에 편중되어 있고 이는 곧 절대적, 상대적으로 빈곤과 결핍으로 직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함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대상은 과거와 같이 뚜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지 않다.

 

과거에는 ‘앙시앵레짐’ 혹은 ‘신분제’라는 분명한 타도 대상이 존재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다. 과거에는 불합리함의 온상을 부조리한 외부세계, 즉 사회로 간주하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프랑스 대혁명식의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되고 말았다.

 

사회화된 우리의 정신세계에는 ‘부조리함이 스스로에 기인한다.’는 암시가 은연중에 내면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명제에는 분명한 어폐가 있다. 군주가 패권을 휘두르던 과거에는 정치 혹은 관습에 의해 서열화와 신분의 세습이 이루어졌다면, 부르주아가 패권을 잡은 현대에는 ‘경제’적 질서에 의해 서열화와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외양만 달리한 사회구조적 측면에서의 불합리함은 현대에도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이 불합리함은 ‘합리성’ 혹은 ‘정의’의 가면을 쓰고 둔갑하고 있으며,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루이 16세’ 혹은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뚜렷한 상징물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프리메이슨’ 혹은 ‘일루미나티’의 실체에 대한 의혹만 제기될 뿐 확증된 바가 없는 것처럼 현대의 타도 대상, 즉 분노의 원천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이렇듯 끊임없이 파고 들어도 또 다른 미궁 속일뿐인, 카프카에스크(kafkaesk)적 현실이 분노조절장애를 부추기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분노해야 할 대상, 분노해야 할 상황(시간)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고 그 존재 또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데서 그와 같은 비정상적인 분노표출 방식이 기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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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씨는 사는 것인가, 자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4

※주의: 이 소설의 내용은 허구이며,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4. AB씨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AB씨는 사랑과 의심이 서로 대척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사랑의 본질이 신뢰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뢰는 끝없는 의심 속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한 결실로서 맺어지는 것이 바로 신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B양 또한 그러한 AB씨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동시에 AB씨의 사랑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담배연기처럼 희미하게 피어나 결국에는 금방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AB씨는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AB씨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요소라곤 하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불행, 타인의 불행입니다. 행복은 상대적인 관념이기에 자신의 행복을 끌어올릴 수 없다면 남들의 행복을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AB씨는 갑자기 행복해지고 싶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불행을 느껴왔기에, 행복이 무언가 새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불행하게 만들 대상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 AB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애석하게도 무고한 일개미들이었습니다. AB씨는 흙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미떼를 발로 짓이겨버립니다.

 

‘이것은 기득권에 대항한 혁명이자 쿠데타다. 하하하.’

 

이게 무슨 얘긴가 하면은 곤충이 지구에서 가장 큰 구성비를 차지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외계인이 본다면 지구는 인간이 아닌, 곤충의 행성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AB씨는 개미 떼를 밟아 죽인 일이 혁명의 시발점이라도 되는 것인 양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개미를 비롯한 벌레들을 찾아 수없이 죽여대도 끝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AB씨는 벌레 죽이는 일을 함께할 동료를 찾거나, 곤충에 투항해 그들의 편에 서거나, 하는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둘 모두 자신에게 그리 큰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 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벌레 대신에 불행하게 만들 다른 대상을 찾기로 합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길을 걷던 AB씨는 갑자기 어느 집 대문 앞에 섭니다. 그와 평소 가까이 지내던 AB양이 두 번째 표적이 된 모양입니다. AB씨는 무언가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립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미소가 서려있습니다. AB양을 괴롭게 할 무언가 기발한 생각을 해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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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저소득층, 소녀

걸 후드(Girl Hood)를 보고......

 

이 영화의 제작국이 프랑스라는 말에 당연히 백인의 영화겠지 싶었는데 영화의 시작부터 흑인들이 중심이 되어 영화를 이끌어 나갔다.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프랑스가 백인의 나라라는 특정 인종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해버리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백인우월주의를 포함한 갖은 고정관념들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고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그러한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것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흔들어 느슨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번 영화제에 대한 참관기를 나는 주인공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것에 중점을 두고 풀어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마리엠은 흑인에, 소녀에, 저소득층이라는 약자적 요소들을 다분히 갖추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약자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따라 가다보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데올로기들을 하나씩 들추어낼 수 있을 것이다.

 

1. 흑인

 

어려서부터 보아온 잘 알려진 서구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인해 내 기억 속의 백인은 모두 화려한 총 솜씨를 뽐내고, 훌륭한 외양을 갖췄으며, 외계 행성을 정복하고, 외계인과도 교류하는 완벽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 또한 백인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암시가 은연중에 내면화되었다. 그렇게 세계를 백인 중심의 시선 속에서 그려나가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서 나를 포함한 황인은 물론이고 영화 주인공과 같은 흑인들은 어느새 세계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한 영향을 준 것은 비단 서구 영화나 드라마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는 항상 백인을 지배자 혹은 승리자로, 흑인을 포함한 식민지 유색인종은 피지배자 혹은 패배자로 묘사하기 일쑤였다. 또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을 개척과 점거의 대상으로 여겨 침략을 합리화하려 했고 백인과 서구 중심의 문명을 우월한 것, 더 발전된 것으로 인식하게끔 해서 침략의 폭력성을 희석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서구적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앓게 하였다.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서구중심의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세계사 교육은 동양과 아프리카 등 여타 문화에 대한 이질감을 형성했다. 백인이 아닌 타 인종, 민족의 문화를 취향의 대상이나 흥미 거리로 전락시키면서 타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안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서서 구경하고 관망하게 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같은 종류의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에는 백인인 옷가게 주인이 흑인 주인공인 마리엠이 옷 구경하는 것을 보고 꺼려하는 태도를 보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명확하게 제시된 바는 아니지만 백인 상점 주인의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백인 중심적 사고, 혹은 유색인종과 거리를 두려는 배타적 기제가 깔려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스크린 안에서는 이 문제를 주인공의 친구들인 흑인 무리가 나서서 물리적,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데에 그치지만, 이것은 너무도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 실현이 여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상대적 기득권층인 남성이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듯이 백인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유색인종을 주변부로 밀어내려는 지배적인 관념을 타개하기 위해선 기득권층인 백인이 함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유색인종 내부의 세계에서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지가 요구된다. 특히 이미 한국에 정착한 동남아계 노동자들, 여성들, 혼혈아들을 향한 멸시와 배격의 시선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순혈인종이라 주장하고 있는 우리들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2. 소녀

 

집안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의 많은 부분은 마리엠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녀에게는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지만, 그는 바깥 생활과 비디오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자고로 집안일과 같은 부차적인 일, 소위 ‘잡일’이라 불리는 그 일들은 이처럼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문맥에서 그녀뿐만 아니라, 일터에서 ‘청소’라는 잡일을 도맡고 있는 그녀의 엄마에게도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주요 업무가 끝난 텅 빈 일터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서서 오물을 치우고 뒷정리를 하는 것이 여성들이 그나마 집안을 벗어나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활동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영화 후반부에 마리엠이 ‘아부’라는 남성 밑으로 들어가 일하게 된 부분에서부터 더욱 부각되고 심화된다. 그의 밑에서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생명줄을 잇기 위해 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남장을 하고 밀매사업에 뛰어들던지, 치장을 하고 아부의 여자가 되던지. 다시 말해 마리엠은 여성성을 버리는 대신에 더 강력한 남성성에 소구를 하던지, 여성성을 보존하되 누군가의 소유물로서 남던지, 하는 온전한 여성, 그 자체로서는 존립할 수 없는 막막한 선택의 기로의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다른 여자무리와 여러 차례 싸움을 벌인다. 여기서 싸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싸움의 현장을 둘러싸고 있었던 남자들이다. 여자들 간의 이러한 싸움은 단순한 다툼을 넘어, 구경하는 남성들로부터 멸시받지 않고 인정받으려는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심하기만 했던 마리엠의 오빠도 그녀의 싸움에 관해서는 관심을 보였고 평소 무시하던 그녀를 싸움에서 이겼다는 결과에만큼은 인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성별간의 일방적인 인정양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 도입부에는 마리엠을 포함한 여자들이 치열하게 미식축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마리엠은 남자의 탈을 쓰려 하지도, 남자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경기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미식축구가 거칠고 몸 부딪히는 일이 많은 종목이라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적이지 못하다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미식축구를 치열하게 하고 있는 어떤 이들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이 여성이었던 것일 뿐이라 생각해도 좋다. 방점은 그들이 누군가를 흉내 내려고 하거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그러한 비체로서의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데 찍힌다. 이를 미루어, 이 장면에 있어서만큼은 주인공을 포함한 여자들이 온전한 여성으로서 존립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온전한 여성으로서의 영역을 미식축구라는 작은 틀의 외부로 이끌어내어 가사, 직업 등을 아울러 삶 전체로 점차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3. 저소득층

 

마리엠과 그 가족은 도시외곽의 작은 집에 사는 저소득층, 그야말로 빈곤계층이다. 이야기 전체에 있어 그녀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엄마가 가장의 역할을 대신 맡아 밖에서 일을 하며 가내 수입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집안 사정은 태그를 때지 않은 옷을 입고, 휴대폰을 훔치며, 유흥비를 마려한기 위해 또래로부터 돈을 빼앗는 일을 마리엠과 함께 일삼고 있는 그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바이다.

 

이들과 같은 저소득층은 경제적 위계 아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차별되기 마련이다. 이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마리엠이 밀매라는 어두운 세계에 몸담게 되는 부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위계 아래 저소득층은 그 틀을 내면화하여 자신들이 속한 집단 내부에 대물리는 경향을 자주 보인다. 이는 <지구를 지켜라>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저소득층 가장’이라는 명패를 짊어지게 한 프리메이슨(Freemason)적 질서아래 가정 내부에서는 더 단단한 위계적 질서, 가부장적 질서를 형성하고야 만 연쇄적 흐름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목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저소득층에서 나고 자란 마리엠의 오빠는 물리적인 폭력까지 휘두르면서 그녀에게 매우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시에 그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위계의 벽을 형성했다. 특히 갖은 수단을 통해 그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며 성적인 것을 포함한 많은 종류의 자유를 박탈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억압과 위계의 흐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리엠 또한 그것들을 내면화하고 대물림해서 그녀의 여동생을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억압하고 제약하려 했다. 이미 일탈과 탈선을 일삼고 있는 몸으로 자신의 동생에겐 그래선 안 된다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된 바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위계와 차별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존립해왔다. 그 외양만 다르지 차별은 언제, 어디서나 실재해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선 어떠한 특정 차별에 대한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는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운동이라는 명분 속에 갇혀 여성들만의 권익을 내세우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여성을 넘어 노동자, 학생, 장애인, 등 모든 소수자를 아우를 수 있는 전 방위적, 전 지구적 차원의 이념과 실천이 필요하다. 동시에 이것은 ‘나’라는 한 개인에게도 요구되는 바이기도 하다. 언제나 차별과 같은 인식적 차원에서의 문제의 해결은 ‘나’라는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소설, <트레버>적 도식 하에서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이 <걸후드>를 포함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여성 ,성적소수자, 노동자에 관한 영화를 모두 아우르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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